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하얼빈(역사소설,안중근,김훈,결론)

by 리치언니 노트 2025. 10. 21.

하얼빈(역사소설,안중근,김훈)

 

김훈의 <하얼빈>은 한 시대의 상징적 인물인 안중근 의사를 통해, ‘죽음’과 ‘의지’, 그리고 ‘조국’의 의미를 다시 묻는 작품이다. 이 책은 영웅을 찬양하는 전기적 서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안중근 — 고뇌하고 두려워하며 신념을 붙잡은 한 사람 — 의 내면을 그린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단순히 “역사소설”이라는 범주를 넘어, 인간 존재의 철학적 탐구로 읽힌다. 김훈의 특유의 절제된 문체는 차가운 겨울 공기처럼 단단하게 가슴을 때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은 눈 덮인 하얼빈처럼 서늘하면서도 뜨겁다.

역사소설로서의 깊이와 현실감

<하얼빈>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대신, 그 시대의 공기를 복원한다. 김훈은 단순한 연대기적 기술을 거부하고, 인간의 체온이 배어 있는 서사를 만든다. 그의 문체는 간결하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역사의 무게를 품고 있다. 이 소설에서 하얼빈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운명과 의지의 교차점이다. 그곳은 제국의 확장과 식민의 비극이 동시에 존재하던 공간이며, 안중근의 삶과 조국의 운명이 교차하는 마지막 무대이기도 하다. 김훈은 사건을 서사 중심에 두지 않는다. 대신 사건을 향해 다가가는 인간의 내면을 조용히 추적한다. 그의 문장은 설명이 아니라 관조다. “눈은 하늘에서 내렸다. 그러나 그 눈은 땅에 닿기 전에 사라졌다.” 이 한 문장 안에는 역사의 허무, 인간의 고독, 그리고 이상이 꺼져가는 시대의 비극이 응축돼 있다. 독자는 그 문장을 읽으며 느낀다. 안중근의 삶은 단지 ‘의거’의 서사가 아니라, ‘시대의 고통을 몸으로 받아낸 인간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김훈은 작가로서 역사를 단죄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인간의 시선으로, 그 시대를 정직하게 바라보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하얼빈>은 단순한 과거의 복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조국’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다시 묻게 하는 현재형 역사소설이다.

안중근의 인간적 고뇌와 내면의 균열

<하얼빈>의 가장 큰 특징은 ‘영웅’을 인간으로 돌려놓았다는 점이다. 김훈은 안중근을 ‘의로운 성인’으로 신격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그는 두렵고, 흔들리며, 때로는 자신의 선택을 의심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행동’한다. 이 긴장감이 <하얼빈>을 진정한 문학으로 만든다. 그는 신념의 화신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의 인간이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그 죽음이 무엇을 남길지 알지 못한다. 그의 결심은 고요하고, 그 고요함 속에는 수많은 질문이 숨어 있다.

“나는 조국을 위해 죽지만, 조국은 나의 죽음 위에 서 있을 것인가.” 이 물음은 단순한 독립운동가의 고민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는 인간의 절규다. 김훈은 바로 이 지점에서 문학을 시작한다. 그는 ‘영웅의 결단’을 기록하지 않고, ‘인간의 떨림’을 기록한다.

안중근은 작품 내내 외롭다. 동지들은 함께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혼자 맞이해야 한다. 그는 총을 쏘는 손보다, 그 총을 쏘기 전 마지막으로 떨리는 마음을 더 오래 응시한다. 김훈은 이 외로움을 통해 ‘의로움’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그는 말한다. “의로움이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그 문장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유효하다. 김훈이 <하얼빈>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조국을 사랑하라’는 구호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라’는 명령에 가깝다. 이 점이 바로 김훈 문학이 지닌 철학적 무게다.

김훈 문체의 미학과 서사 구조의 완성

김훈의 문장은 건조하다. 하지만 그 건조함 속에는 뜨거운 불길이 흐른다. 그의 문체는 ‘절제의 미학’이며, <하얼빈>은 그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의 문장은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지만, 읽는 사람의 감정을 끝없이 자극한다. 이는 ‘비어 있음’이 만들어내는 공명이다. 그가 묘사하는 하얼빈의 겨울은 단순히 차가운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얼어붙은 상징적 장소다. 안중근이 걸었던 눈 덮인 거리, 그곳의 정적과 한기가 곧 그의 운명과 맞닿아 있다. 김훈은 서사 구조에서도 혁신을 시도한다. 시간을 직선으로 나열하지 않고, 현재의 순간과 과거의 회상을 교차시킨다. 이 구성은 안중근의 기억과 현재가 뒤섞이며, 그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읽는 동안 독자는 마치 하얼빈의 차가운 공기를 직접 마시듯 느끼게 된다. 김훈은 또한 ‘침묵’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많은 장면에서 인물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공허하지 않다. 그 침묵 속에서 독자는 더 많은 말을 듣는다. 이것이 김훈 문체의 힘이다. 감정의 폭발 대신, 감정의 잔향을 남긴다. 그 여운이 페이지를 덮고도 오래 남아, 역사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하얼빈>에는 몇몇 장면과 문장이 독자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 하얼빈의 눈보라 속에서 안중근이 느끼는 고요, 재판정에서의 날선 침묵, 그리고 옥중에서의 내적 대화가 그것들이다. 김훈은 장면을 길게 설명하기보다, 몇 개의 핵심 문장으로 상황을 환기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그 결과 독자는 비어 있는 공간에 스스로 상상을 채우며, 이야기의 밀도를 더욱 깊게 체감한다.

예를 들면, 재판에서의 한 대목은 매우 짧게 쓰이지만 심리적 압박은 크다. 재판정의 침묵, 판결을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안중근이 마주한 자기 자신. 이런 장면들에서 김훈의 문장은 절제된 힘을 발휘한다. 독자는 그의 문장을 통해 사건의 외형보다, 인물의 내면에 주목하게 된다. 또 다른 인상적 요소는 ‘일상적 세부 묘사’다. 김훈은 전투나 격렬한 장면 대신, 아주 소소한 행위들을 통해 인물의 상태를 드러낸다. 예컨대, 손을 깨끗이 씻는 행위,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시는 행위, 옷깃을 여미는 작은 몸짓들이 그들의 심리를 대변한다. 이러한 세부는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인간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결론

<하얼빈>은 과거의 사건을 다루지만, 그 질문은 시대를 초월한다. 작가는 독자에게 묻는다. 영웅을 기리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그가 느꼈던 고뇌와 인간적인 결함까지 바라볼 용기가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역사적 판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삶과 신념을 성찰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와 ‘신념’을 논한다. 그러나 김훈은 감정적 판단을 유도하기보다,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어떤 신념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호하지만 잔잔하다. 독자는 책을 덮은 뒤에도 이 질문을 품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또한 <하얼빈>은 ‘기억의 윤리’를 강조한다. 역사는 단지 사건의 나열이 아니다. 사람의 고통,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남긴 파장까지 포함된 총체적 기록이다. 김훈은 그 기록의 일부를 조용히 드러내며, 독자에게 기억의 무게를 상기시킨다. <하얼빈>은 단순히 안중근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소설이 아니다. 이 책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적 선언문이다. 김훈은 영웅을 신화에서 끌어내어, 인간의 자리에서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그의 문장은 차갑지만, 그 속에는 뜨거운 생명이 뛰고 있다. 이 작품은 역사에 대한 기억이자, 삶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읽고 나면 독자는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는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 수많은 ‘우리’의 얼굴과 닮아 있다. <하얼빈>은 결국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한 사람의 기록이며, 그 기록을 통해 김훈은 묻는다. “당신은 어떤 신념으로,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이 바로 이 작품이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하얼빈>을 읽는다는 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다. 담담하게 책을 읽다 보면 가슴이 저민 듯 슬퍼지는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감동과 애국심을 둘 다 불러일으키는 재밌는 소설이다.